오씨연원

오씨연원

오(吳)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오(吳)씨는 춘추전국시대 오(吳) 나라 왕을 기원으로 한다. 오(吳)씨는 중국 백가성(百家姓) 제6위이다. 한국의 오씨는 신라와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온 성씨이며, 인구는 약 70만명으로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1위이다.

 

1. 오씨의 기원

 

오(吳)씨는 오(吳) 나라에서 기원하였으며, '거룩하다', '가장 높다'는 뜻이다.
오씨의 유래는 춘추전국시대 중국 양자강 부근의 주나라 제후국이었던 오(吳)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중국 양자강 부근의 주나라 일족으로 주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 주 태왕(周太王)의 장남인 오태백(吳太伯)을 시조로 하여 희성(姬姓)에서 나왔다.
제후국 오(吳)나라는 태백을 초기 군주로 시작하여 하대 자손인 부차왕의 손자인 루양부터 주나라 천자로부터 오(吳)씨 성을 하사받아 오씨가 되었으며, 비로소 오(吳) 나라의 왕으로 되었다.

 

2. 중국의 오씨

 

오(吳) 성은 중국 국가 통계국의 2010년 제6차 전국인구조사(第六次全國人口普?)에서 약 2,460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중국 성씨 인구 순위 10위이며, 중국 인구의 2.05%를 차지한다. 오국왕실적지계(吳國王室的支系)로서 중국 강남(江南)의 대성이다.

 

3. 한국의 오씨

 

한국의 오씨는 중국에서 들어온 성씨이며, 중국에서 동래한 시기가 다른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신라 지증왕 때 중국에서 신라로 입국한 뒤 중국으로 귀환한 오첨(吳瞻)을 도시조로 삼는 향파(鄕派)고, 다른 하나는 고려 성종 때 중국 송(宋) 나라에서 귀화한 학자인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삼는 해주 오씨 경파(京派)다.
두 계통은 서로 다른 인물을 시조로 삼고, 별개의 족보를 갖고 있다. 대부분의 오씨는 대종인 해주 오씨(海州 吳氏)에서 분파된 것이다.
조선성씨통보에 210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동국만성보에 의하면 20여본이 있다고 한다.
오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19명, 상신 4명, 대제학 3명, 개국공신 2명, 공신 8명, 청백리 3명을 배출했다.
오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706,908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1위다.

 

(1) 해주 오씨 향파(鄕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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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7년 오탁진이 작성한 《오씨30세계도》에 근거하면 오씨의 도시조는 500년(지증왕 1)에 중국에서 신라로 입국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오첨(吳瞻)이다.
오첨(吳瞻)은 태백왕의 25世인 오기(吳起; 초나라 재상)의 45대손이다. 오첨(吳瞻)은 왕명으로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양에서 2남 1녀를 두고 22년을 살다가 521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둘째 아들 오응(吳膺)은 나이가 어려 중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
오응(吳膺)의 9대손 오희(吳禧)는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딸이 고려 태조의 왕비인 장화황후가 되고 오희(吳禧)는 국구(國舅)가 되어 다련군에 봉해졌다. 장화왕후는 고려 2대 왕 혜종의 모후가 된다.
오응의 12대손 오광우(吳光佑)가 980년 다시 송나라에 들어갔었는데, 그의 현손인 오연총(吳延寵)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으므로 오연총이 오씨의 중시조가 된다.
중국 사천성 출신의 오연총은 고려에 동래하여 윤관과 함께 부원수로 북변의 여진을 토벌하였으며, 이부·예부·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오연총의 5세손인 오수권(吳守權)은 오현보(吳賢輔), 오현좌(吳賢佐), 오현필(吳賢弼)이라는 세 아들을 두었다.
이들 삼형제는 고려를 침입해 온 거란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각각 해주군(海州君), 동복군(同福君),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져, 해주 오씨, 동복 오씨, 보성 오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2) 해주 오씨 경파(京派)

 

1401년 오광정, 오선경이 작성한 《해주오씨족도》에 의하면, 시조는 오인유(吳仁裕)이다.
오인유를 시조로 삼는 종파를 해주 오씨(海州 吳氏) 경파(京派)라고 한다. 《해주오씨대동보》에 수록된 〈문양공 지석문(文讓公 誌石文)〉에 의하면, 오인유(吳仁裕)는 중국 송나라의 학사로 984년(성종 3년) 고려에 귀화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고, 해주(海州)에 정착하면서 해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경기도 용인시에 해주 오씨 시조단이 있다.
해주 오씨(海州 吳氏)는 오씨(吳氏) 문중에서 가장 번성한 가문이 되었다. 오인유의 14세손 오윤겸(吳允謙)은 관찰사와 좌부승지를 지내고 인조반정 후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낸 뒤 우의정과 영의정에 이르렀다. 오윤겸의 손자 오도일(吳道一)은 숙종 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오윤겸의 현손 오명항(吳命恒)은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우의정에 이르렀다.

오인유의 14세손 오정방(吳定邦)은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고, 오정방의 증손자 오두인(吳斗寅)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吳太周)는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으며, 오태주의 아들 오원(吳瑗)과 손자 오재순(吳載純)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연일 오씨(延日 吳氏) 시조 오연경(吳延慶)은 해주 오씨의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오효성(孝成)의 큰 아들이다. 연일(延日; 현 경상북도 포항시)에 세거하던 토착 사족이다. 오사충(吳思忠)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어 영원 오씨(寧遠吳氏)로 분파되었다.
울산 오씨(蔚山 吳氏) 시조 오연지(吳延祉)는 해주 오씨의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오효성(孝成)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에 이르렀고 동남 변경을 침범하는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으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학성은 울산광역시의 옛 지명이다.

 

4. 본관

 

황해도 해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해주 오씨(海州 吳氏)가 오(吳)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황해도 벽성군, 신천군, 재령군, 경기도 용인시, 안성시, 충청남도 아산시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자료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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